기계는 지능을 가질 수 있지만 의식을 갖지 못한다. 이 명확한 구분이 현대를 가르는 칼이다. 영상은 켄 리우와의 대화를 통해 인공지능 시대에 인간다움이란 무엇인지 묻는다. 질문 자체가 답보다 중요한 순간이다.
리우가 주목하는 지점은 예리하다. AI는 주저 없이 말한다. 모든 것에 답한다. 사랑이 무엇인지, 진심이 무엇인지, 감정이 무엇인지 묻는 질문에 즉각 언어로 답한다. 하지만 도덕경 56장은 이렇게 말한다. "아는 자는 말하지 않고, 말하는 자는 알지 못한다." AI 시대의 우리는 정반대 세계에 살고 있다. 계속 말해야 산다고 믿는다. 침묵은 무능으로 본다.
여기서 역설이 생긴다. 인간이 물리적 경험을 통해 아는 것들—사랑의 무게, 죽음의 냄새, 자식을 안을 때의 온기—AI는 오직 언어로만 안다. 언어는 경험의 그림자일 뿐이다. 영상이 들여다보는 것은 이 간격이다. 기계가 모든 데이터를 학습해도 도달할 수 없는 그 무언가.
흥미로운 것은 팬데믹 때 리우가 겪은 상상력의 위기다. 미래를 예측할 수 없다는 깨달음은 과학소설 작가에게는 패배였다. 하지만 도덕경을 다시 펼쳤을 때 그가 발견한 것은 예측 불가능한 세계와 어떻게 마주할 것인가의 방법이었다. 수천 년 된 책이 오늘의 위기에 더 유효하다는 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근본적인 질문들은 시간을 초월한다는 뜻일까.
우리는 행복을 추구한다고 믿으면서 그 추구 과정에서 정말 원했던 것—누군가의 삶에 차이를 만든 경험, 살아있었다는 느낌—을 놓친다.
욕망의 악순환을 그리는 영상의 통찰은 단순하지만 날카롭다. 일을 얻으면 승진을 원하고, 승진하면 더 큰 집을 원한다. 언제나 다음이 있다. 하지만 인생의 끝에 서면 깨닫는다. 우리가 원했던 것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고. 욕망과 진정한 원함 사이의 불일치. 이 간격을 보는 것이 인간다움의 시작이 아닐까.
AI는 이 간격을 인식할 수 없다. 욕망의 악순환은 육체가 있는 생명에게만 찾아온다. 숨을 쉬고, 밥을 먹고, 죽음을 앞두고 있는 존재만이 진정으로 그 무엇인가를 원한다. 기계의 지능은 높아도 이 원초적인 경험 없이는 의식에 도달할 수 없다. 그렇다면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것은 지능이 아니라 취약성이 아닐까. 죽음 앞에서의 절박함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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